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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시마소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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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쓰시마의 가장 큰 축제 '아리랑마쓰리'-오마이뉴스(2005.8.11)
등록일 2005. 08. 16 조회수 2,328
외국치고는 너무 가까이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울릉도로 가는 뱃길도 2시간30여분 걸리는데 외국을 가는데 비슷한 시간이 걸린다는 사실과, 말로만 듣던 일본이라는 나라의 땅을 첫발을 내딛으면서 고작 떠오른 생각이 너무 가깝다는 내 느낌까지도 생경하기만 했다.


▲ 쓰시마역사민속자료관 입구에 있는 고려문은 조선통신사를 맞이하기 위해 만든 쓰시마 성의 문이었다

내 머릿속에 일본이라는 나라를 떠 올리면 우선 떠오르는 낱말들은 ‘임진왜란’, ‘일제강점기’, ‘일본헌병과 순사’, ‘731부대의 인체실험’ 등 과거형과, 현재진행형인 ‘독도영유권주장’, ‘역사교과서 왜곡’, ‘군대보유를 위한 헌법개정 추진’ 등 현재진행형, 그리고 매년 톤 단위의 플루토늄을 들여오고 첨단기술을 바탕으로 군사력을 무장하면 아시아의 화근이 될 것이라는 온통 부정적인 이미지뿐이다.

이번 여행은 사실계획에 없었던 길이었다. 부산에서 대마도까지 1일 여행이 가능하다는 말을 숱하게 들어왔던 터에 부산에 들른 김에 사진 몇 장이나 찍고 오자는 생각에서 가볍게 출발한 여행이다.


▲ 슈젠지(修善寺)의 최익현 선생 순국비는 한일 양국의 유지들이 건립한 것이다

8월 6일 이른 아침 부산 중앙동 국제여객터미널은 많은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이들은 쓰시마(對馬) 섬에서 열리는 아리랑마쓰리(아리랑祭)에 참가하는 무용단과, 조선시대에 임진왜란 후 중단되었던 조선과 일본과의 외교관계에서 당시 대마도주 소오(宗의)씨의 요청에 의해 약 400여년 전 조선에서 일본에 파견했던 ‘조선통신사(朝鮮通信使)’의 행렬 재현과 공연을 위해 쓰시마를 방문하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처음으로 알았다.

쯔시마를 향한 여객선안에서는 올해 (사)조선통신사문화사업회 (http://www.joseontongsinsa.org) 주최 조선통신사 행렬 재현 행사에 ‘정사(正使)’로 참여하는 조동호(趙東鎬·73·성남시 분당) 선생을 만날 수 있었다. 조동호 선생은 숙종 37년(1711년) 조선통신사 정사였던 조태억(1675~1728) 대사성의 9대 손이라고 했다.


▲ 우리나라 궁중의상을 입고 기념촬영하는 일본인 노부부

정사는 조선시대 외국에 파견하는 사신의 우두머리로 이번 조선통신사 행렬 재현 행사에 ‘정사’로 참여하는 조동호 선생은 300여년 만에 선조가 갔던 길을 따라 일본 땅을 밟는 셈이다.

이즈하라(嚴原)항에 도착하여 입국 수속을 마친 후에 서둘러 숙소를 구하러 다녔지만, 아리랑마쓰리를 보기위해 우리나라 뿐 아니라 일본의 각지에서도 많은 관광객들이 쓰시마를 찾은 관계로 여의치 않았다. 두어 시간을 헤맨 끝에 이즈하라 항구 근처의 미나토민슈쿠(みなと民宿:민박집)의 방을 간신히 구할 수 있었다.


▲ 아리랑마쯔리의 메인이벤트 조선통신사 행렬의 선두

이즈하라의 곳곳의 사찰과 관공서에는 조선통신사가 묵었다는 표석들이 세워져 있다. 도로 곳곳의 표지판은 일본어와 우리글이 함께 적혀 있어 얼핏 우리나라 속의 일본이 아닐까 착각이 들 정도다.

조선통신사를 맞이하기 위해 만들어 ‘고려문’이라는 명칭이 붙은 옛 이즈하라의 성문은 지금 대마역사민속자료관의 입구로 한국인 방문객들을 맞고 있다. 지금의 문은 태풍으로 훼손된 것을 1989년 복원한 것이라 한다. 매년 8월의 첫째 토·일요일에 거행되는 아리랑마쓰리는 조선통신사 행렬재현을 메인이벤트로 하여 노젓기대회, 불꽃놀이 등 다양한 행사가 벌어진다고 한다.

1박2일의 빠듯한 일정상 이즈하라의 우리나라와 연관된 유적들을 찾아보는 것으로 만족하기로 했지만, 오후 5시30분경부터 내린 장대비로 이마저 여의치 못하게 되어 일찍 숙소에서 잠을 청했다.


▲ 조선통신사 행렬에 참가한 무용단

7일 아침, 언제 그랬냐는 듯이 화창한 날씨 속에 아침식사를 마치고 제일 먼저 찾은 곳은 조선말 우국애민정신과 위정척사사상으로 74세의 고령에도 불구하고 의병을 일으켜 목숨이 다하는 순간까지 진충보국(盡忠報國)하고자 하였으나 끝내 뜻을 이루지 못하고 적지 쓰시마에서 순국한 최익현 선생의 장례를 치른 슈젠지(修善寺)를 찾았다.

최익현 선생의 유해는 백제의 비구니가 지었다고 전해지는 이 절에서 장례를 치른 후 부산으로 이송되었다. 지금의 슈젠지의 순국비는 선생의 넋을 기리고자 1986년 한·일양국의 유지들이 힘을 모아 세운 것이다.


▲ 조선통신사를 호위하는 쓰시마의 무사들

슈젠지를 나와서 사무라이(武士)들이 살던 골목을 따라 이즈하라관광협회를 찾으니 마침 한복체험행사로 한국궁중의상체험이 진행중이었다. 특히, TV드라마 대장금의 인기를 반영하듯 대장금 복장도 젊은 여성들에게 인기를 끌고 있었다.

점심시간이 지나자 이즈하라를 가로지르는 하천주변에는 조선통신사 재현행렬을 보기위해 많은 관광객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올해 조선통신사 재현행렬은 고려문을 출발하여 이즈하라마치(嚴原町)의 큰 길을 일주하여 역대 대마도주들의 묘석고, 조선통시신사 관련 유물 및 토쿠가와(德川)의 역대 장군들의 위패가 있는 반쇼인(万松院)이라는 사찰에 도착하여 마치게 된다.


▲ 조선통신사를 호위하는 쓰시마의 도주(島主)

조선 통신사 행렬은 이후 쓰시마를 떠나 옛길을 따라 에도(江戶:지금의 도쿄)에 도착할 예정이라고 한다. 에도바쿠후(江戶幕府)가 엄격한 쇄국정책을 고수할 때 에도까지 들어올 수 있었던 유일한 외교사절이 바로 ‘조선통신사’였다고 한다.

300~500여명에 달하는 조선통신사 일행은 당시 조선의 최고 관료와 학자, 문화인들이 함께 하였으며, 조선통신사가 묵는 숙소에는 일본의 수많은 학자와 문인들이 모여들어 학문과 예술의 교류가 이뤄졌다고 한다.


▲ 조선통신사 정사를 호위하는 조선무관들의 깃발

이번 조선통신사 재현행사에 참가한 한 향토사학자는 특히 내륙에서는 일반 서민들이 조선통신사 일행과 접촉할 수 없었으나, 쓰시마에서는 이런 대규모 사절단이 한번에 숙식하기가 어려운 관계로 고위관료를 제외한 악사나 하급관리들은 쓰시마의 하급관리나 민간인들의 주택에 묵으면서 다양한 교류가 이뤄졌을 것이라고 추측하고 있다.

조선통신사를 맞이하는 일본의 실무를 담당하는 쓰시마에서 주도적인 활약을 했던 인물이 아메노모리 호슈(雨森芳洲)라고 한다. 1719년 제9차 조선통신사의 제술관인 신유한과 아메노모리 호슈와의 교류는 특히 유명하며, ‘서로 미워하지 말고 싸우지 말며 진실을 가지고 교류하는 것’이 ‘성신(誠信)의 교류’임을 강조한 호슈의 외교철학은 주한일본대사의 망언, 역사교과서 왜곡, 일본총리가 전범의 위패가 있는 신사를 참배하는 일과 독도영유권 주장으로 한일양국이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는 이때에 현재의 일본 정치인들이 되새겨볼 일이다.


▲ 이번 행사의 정사를 맡은 조동호 선생은 숙종 37년(1711년) 조선통신사 정사였던 조태억(1675~1728)대사성의 9대 손 이다


▲ 우리나라 및 일본의 많은 관광객들과 주민들이 조선통신사 재현행렬을 구경하고 있다

ⓒ2005 이장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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