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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시마소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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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대마도는 우리 땅인가]"조선과의 화평 최우선시하라" -경상일보(2005.11.26)
등록일 2005. 11. 28 조회수 1,834
② 통신사의 중간 기착지와 반쇼인(萬松院)


대마도 역대 도주인 소오가(宗家)의 위패와 묘지가 있는 반쇼인. 조선과의 국교수교에 공이 컸던 19대 도주 소오 요시토시를 위해 그의 아들 소오 요시나라가 1615년 창건했다.

이즈하라에서 동쪽으로 조금 떨어진 곳에 조선조 시대 일본으로 파견된 통신사 선단을 위한 전용 선착장이 유적으로 남아 있다. 대마번이 준설하여 주로 공선(公船)과 무역선 그리고 통신사 선단이 정박하던 곳이다. 안내표지판에는 대마번 오후나에(御船江)로 되어 있으며, 현재까지 남아 있는 유구(遺溝)는 1633년에 조성 된 것이라고 한다. 유구 내부에는 네 개의 돌제(突堤)가 있으며 돌제사이에 배가 정박하도록 설계되어 있다. 당초에는 창고 등 부속건물이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흔적을 찾기 어렵다. 통신사 일행은 여기에서 하선하여 언덕을 넘어서 반쇼인으로 갔다고 한다.

또한 소오가성(宗家城)의 유적지로 가는 갓길에는 '바쿠후시샤 하야시 다이가쿠노카미 슈쿠간세키(幕府使者林大學頭宿館跡)'라는 표석을 볼 수 있고, 그 표석의 기둥에는 '조선통신사를 막부가 접대하던 곳(朝鮮通信使幕府接待之地)'라고 적혀 있다. 이곳이 곧 조선으로 오던 일본사절과 일본으로 가던 조선 사절들이 주로 유숙했던 객관임을 짐작할 수 있다.

소오가성의 유적지는 많이 훼손되기는 했지만 성의 일부가 그대로 남아 있다. 성벽을 따라 한참을 올라가면 기둥 네 개의 맞배지붕 형태로 지은 고려문(高麗門)이라는 현판의 누각이 나온다. 여기서 대마도주가 조선통신사 행렬을 맞이하였다고 하며, 한때 태풍으로 붕괴된 것을 1980년에 복원했다는 설명이었다.

고려문 오른편에는 향토사료관과 역사민속자료관이 있다. 역사민속자료관에 들어서자 길이 약 17m의 통신사행렬도가 눈길을 끌었다. 이 그림은 약 500명으로 구성된 통신사 행렬이 서울을 출발하여 부산을 거쳐 대마도에 도착하였다가 세토나이카이를 항해하여 에도로 가는 장면을 모아 한 폭의 그림으로 그린 화려한 행렬도였다. 그 밖에도 소오가문고사료집, 조선조 때 대마도로 보낸 각종 교지(敎旨)가 진열되어 있었다. 그리고 우리나라에서 흔히 접할 수 있는 청동검, 청동종, 토기, 철제다리미, 천칭, 나침판 등도 볼 수 있었다.

대마도의 역대 도주(島主)는 소오가(宗家)이며 명치유신으로 폐번(廢藩)된 32대 요시아키라(義達=重正)까지 이어왔다. 대마번(對馬藩)의 규모는 자체의 1만석에다가 조선사신접대 등 조선과의 특수 관계를 고려하여 도쿠가와막부(德川幕府)로부터 봉한 규슈 사가(佐賀)현의 2만석 땅, 그리고 조선과의 독점교역에서 얻는 수익을 감안하여 10만석의 다이묘(大名)로 인정받아 한때 일본 전국의 280명의 다이묘 중 50위의 반열에 올랐던 것이다. 특히 임진왜란 때는 대마도가 왜군의 전진기지였으며 번주 소오 요시토시는 그의 장인인 고니시 유키나가와 함께 선발대로 부산포에 상륙하여 서울과 평양을 함락한 적장이었다.

우리는 소오가(宗家)의 유적 반쇼인을 찾았다. 이 절은 조일간의 국교수복은 물론 조선과의 교역재개에 공이 컸던 19대 번주 소오 요시토시를 위해 그의 아들 후계 번주 요시나리(義成)가 1615년 아버지의 명복을 비는 쇼온사(松音寺)를 창건하였다. 요시나리는 부친의 법호를 따서 반쇼인으로 개칭하여, 이후 소오가의 보리사가 되었다. 때문에 반쇼인은 소오 가문이 대대로 이어온 대마번의 원찰이며, 본당은 대마도에서 가장 오래된 모모야마(桃山)양식으로 지어진 건물이다.

본당 정면에는 고미즈노오(後水尾)천황의 셋째 딸이 쓴 '반쇼세이샤노가쿠(萬松精舍之額)'라는 편액이 걸려있다. 본당 우측에는 도쿠가와 역대장군들의 위패를 안치하고 다른 한쪽에는 조선국왕이 하사한 삼구족(三具足)이 진열되어 있다. 삼구족은 동으로 만든 향로, 화병, 촉대 세트를 말한다. 화병은 뚜껑에 사자가 앞발을 들고 앉아 있는 모양이 특이하며, 촉대는 새가 거북의 등위에 올라앉아 부리로 촛대를 물고 있는 진기한 모습이다.

본당에서 산으로 돌계단을 올라가면 산문(山門)이 있고 우측에 소오가의 묘지인 고레이야(御靈屋)가 있다. 입구에 서있는 신문고인 간고(諫鼓)를 지나 산위에는 역대 도주의 묘들이 줄지어 있다. 재미있는 것은 임진왜란 선봉장 19대 도주 요시토시의 묘는 작은 반면 그 후대 20대 요시나리와 21대 요시자네(義眞)의 무덤은 훨씬 더 큰 규모라는 점이다. 그러나 무덤의 크기와는 상관없이 후계 번주들은 무슨 큰 일이 있을 때마다 요시토시의 무덤 앞에서 결정을 했다고 하는데 이는 요시토시가 최후로 남긴 "조선과의 화평을 최우선시"하라는 유언 때문이라고 한다.

묘지 위쪽에는 둘레가 무려 5~7m나 되는 삼나무(大杉)가 세 그루 있다. 수령이 1600년이라고 하며 대마도에서는 최고령으로 나가사키현의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어 있다.
[2005.11.25 22: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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