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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대마도는 우리 땅인가]통신사 부활 혁혁한 공 세워-경상일보(2005.11.28)
등록일 2005. 11. 28 조회수 2,133
④ 사명대사와 통신사의 발자취

1604년 사명대사가 탐적사로 일본에 갔을 때 머물렀던 대마도 서산사 전경. 이후 역대 조선통신사가 이곳에 머문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임란 후 1604년 7월 하순, 조선조정은 사명대사를 '탐적사'라는 이름으로 일본에 파견하였다. 일본정세를 탐정하고 특히 재침 예방을 강구하라는 중차대한 임무를 띤 사명대사는 대마도에 기착하여 약 3개월간 서산사에 유숙하게 된다. 또한 그 이후 에도(江戶)시대의 역대 조선통신사 일행도 이 절에서 유숙하였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교토 고잔(五山)의 린반소오(輪番僧)인 외교담당승려들이 서산사에 상주하여 조선과 교신하는 외교문서를 작성했다고 한다.

당시 서산사는 이테이안(以酊庵)이라 불렸으며 '이테이안'이라는 말은 에도시대 이전부터 부쳐진 외무부서의 별칭이기도 하였다. 법당의 본존은 대일여래좌상으로 고려불이며, 그 옆에는 임진왜란 때 종군승이며 외교승으로 유명했던 케이테츠 겐소(景徹玄蘇)의 등신불이 모셔져 있다. 1580년 대마도주 소오 요시토시는 하카다(博多)의 세이후쿠사(聖福寺) 주지였던 겐소를 대마도 이테이안에 불러들여 외교승으로 삼고 조선과 명나라와의 외교를 전담케 했던 것이다.

사명대사는 이 절에서 3개월 동안 기다린 끝에 겐소와 소우 요시토시의 중개로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마나기 위해 교토로 가서, 1605년 3월 초 교토 후시미성(伏見城)에서 강화회담을 가졌으며, 이 회담을 통해 국교재개와 통신사 부활의 길을 열었고, 또한 전란 중에 일본으로 잡혀간 피로인의 송환에 합의 하게 된다.

그리고 사명대사는 귀로에도 다시 대마도에 머물었으며, 일본 측은 강화협상의 합의에 따라 대마도주로 하여금 전란 중 잡혀간 피로인 1천390명을 사명대사의 귀로에 맞추어 송환토록 하였다. 대사의 외교성과로 조선조는 1607년 여우길(呂祐吉)을 정사로 하는 통신사(제3회까지의 명칭은 회답겸쇄환사)를 파견하였고, 그 이후 친선 우호 겸 문화사절로서 통신사가 에도시대 260년간 총 12회에 걸쳐 일본에 파견되었던 것이다.

일본에서는 사명대사를 송운대사(松雲大師)라고 불렀다. 사명대사는 이 절에 유숙하는 동안 수많은 시를 지었다. 또한 교토에 체류하면서도 송운대사라는 이름으로 수없이 많은 시문으로 일본의 고승들과 필담하며 친분을 돈독히 하였다. 대사가 대마도에 유숙하는 동안 중책을 띠고 왔음에도 기약 없이 기다리던 불편한 심정을 읊은 여러 수의 시가 '사명집' 등 문헌에 수록되어 오늘날까지 전해진다. 그 중에서 2수의 시를 골라 소개한다.

아아 늙은 이 몸 대장부답지 못해, (老去嗟吾不丈夫)

삼가 임금님의 명을 받들어 멀리 바다를 건넜도다. (恭承朝命遠乘?)

허리를 굽혀 잠깐 얽어매려하지만, (折腰暫遂摩計)

어느 해나 군사를 길러 나라를 크게 만들 것인가.(生聚何年沼吳)"



또한 절 앞뜰에 핀 국화꽃을 보고 시름을 달래는 시도 있다.



쓸쓸히 부는 바람에 나뭇잎 물에 떨어지니, (蕭蕭落葉下汀洲)

하늘 끝에 돌아가는 구름바다 북녘은 가을이다.(天末歸雲海北秋)

절후는 중양이 지났는데 돌아가지 못하니, (節過重陽不歸去)

노란 국화가 공연히 나그네의 시름만 자아낸다. (黃花空遣人愁)"



사명집은 대마도 역사민속자료관에도 1부가 보존되고 있다.

2004년 열린 아메노모리 호오슈 250주기 특별자료전시회에 이 사명집 전집이 전시되었다. 전시장 및 관련 도록에는 사명대사의 생애에 관한 설명문과 사명집의 내용을 자세히 소개하였다. 도록의 설명문에 따르면 사명집은 '권 1~4에는 시(詩), 권 5는 게(揭) 즉 불덕을 찬미한 시, 권 6에는 잡문, 권 7에는 신체시(新體詩)가 수록된 시문집'이라 기록되어 있었다.

사명집은 또한 사가(佐賀)에 있는 나고야죠(名護城)박물관에도 소장돼 있다. 대마도 민속자료관과 나고야죠박발관에 소장되고 있는 사명집은 모두 원본(1652년 중간본)임이 확인 되었다. 사명집은 사명대사가 지은 시를 모아 대사의 입적이후 문하생 혜구(惠球)스님이 1612년(광해군 4)에 초판으로 간행하였으며, 이 책의 서문은 허균, 발문은 뇌묵당 처영대사가 지었다. 원본 목판은 밀양 표충사 사명대사 유물관에 보관되고 있다. 그 후 목판으로 성일(性一)스님이 이 책을 1652년 (효종 3년)에 중간하였다.

나는 사명대사의 시를 마음 속에 간직하고 서산사 정원을 거닐며 그 때 대사의 심경을 헤아려 보려했다. 그러나 국화는 간데없고 뜰에는 '조선통신사 학봉 김성일시비(朝鮮通信使鶴峰金誠一先生詩碑)'가 세워져 있다. 임진왜란 직전 일본 정세를 탐지하러 보낸 정사 황윤길(黃允吉)과 부사 김성일(金誠一)이 아닌가. 특히 김성일은 당파싸움에 눈이 어두워 정사와 부사가 각각 상반되는 보고를 함으로써 나라의 안위를 분간 못한 인물로 낙인이 찍혔다. 김성일이 '왜적이 쳐들어오지 않을 것'이라 하여 조정은 왜적의 침공에 전혀 대비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서산사 뜰에, 그것도 사명대사와 같이 전란 중에 나라와 백성을 구하고 전후에는 강화협상에 성공한 훌륭한 호국지사의 체취가 물씬한 이곳에 김성일의 비석을 세우다니, 그 자리는 사명대사와 같은 분의 기념비나 동상 건립을 위해 확보되어야 할 공간이거늘…, 우리 일행은 모두 격분하여 이 비석을 세운 김성일 후손들을 꾸짖었다.
[2005.11.27 2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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