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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대마도는 우리 땅인가]일본내 통신사 첫번째 기착지-경상일보(2005.11.29)
등록일 2005. 11. 29 조회수 1,876
⑤ 통신사와 대마도의 역할

통신사들이 머물며 외교업무를 보았던 대마도 이즈하라에서는 해마다 조선통신사 가장행렬이 열린다.

조선 조정에서 일본에 파견한 통신사 행사는 일단 대마번의 전담 업무이었다. 조선통신사는 출발에 즈음하여 정사, 부사와 종사관 3사신은 서울(한성부) 창덕궁에서 국왕을 알현하며 이때 국왕이 직접 국서를 전교한다. 총 500명에 가까운 통신사 일행은 서울을 떠나 육로로 부산에서 재집결하여 출항을 기다린다. 부산에서는 도쿠가와 장군이나 세자 등에게 조선국왕이 보내는 예물을 비롯해, 막부의 로오쥬(老中)와 기항, 기숙지의 다이묘(大名)나 사찰 등에 증정할 선물을 준비하여 3척의 화물선(복선 卜船)에 싣는다. 사절단은 마찬가지로 3척의 기선(騎船)이라 불리는 배에 오르는데, 정사선(正使船)은 길이 약 40미터, 약 150명이 타는 큰 배이다. 이윽고 길일(吉日)을 골라 해신(海神)에게 항해의 안전을 비는 기풍제(祈風祭)를 올린다. 그 장소는 연가대(永嘉台 부산 자성대 소재)이며, 여기는 17세기 초에 부산만의 가장 깊숙한 장소에 준설하였는데, 토사로 쌓아 대지(台地)를 만들어 항구의 기능을 부여하였다.

모두 6척의 선단과 대마로부터 온 출영선 수척이 순풍을 기다려 모든 선박이 같은 뱃길을 따라 대마도로 향한다. 부산과 대마도 사이는 가장 가까운 곳이 약 50킬로, 순풍으로 파도가 잔잔한 날은 쾌적한 뱃길을 즐길 수 있지만, 그 때는 기상 정보가 충분치 않았던 시대라 어려운 항해를 피할 수 없었다. 가끔은 선체가 손상되거나 배 멀미로 고통 받는 사람들이 속출했다.

선단은 일단 대마도 최북단, 사스나우라(佐須那浦) 또는 와니우라(鰐浦)에 도착한다. 거기서부터 선단은 대마번이 보낸 뱃길 안내선의 보호를 받으며 시계 바늘 방향으로 섬의 작은 포구 서너 곳을 둘렀다가 드디어 번의 초카마치(城下町)인 후츄(府中= 현재의 이즈하라)에 도착한다.

이즈하라에서는 대마번주와 이테이안의 장로 두 사람이 탄 배가 항구 밖까지 출영하여, 배에서 최초의 인사를 주고받는다. 통신사 일행은 이즈하라에서 적어도 10일간, 긴 경우는 3주간을 머물게 된다. 배를 보수하거나 식량 등을 조달하고 게다가 바람까지 기다려야 하기 때문이다. 체류하는 동안에는 대마번주의 초청향연이 있다. 또한 이테이안의 석학 승려와도 여기서 만나게 되는데, 그들과의 시문 화답이나 필담 교환으로 3사신 등 일행의 마음을 위로한다. 1711년과 1719년의 통신사는 대마번이 아메노모리 호오슈와 마츠우라 카수미누마(松浦霞沼) 두 사람의 뛰어난 학자를 진문관(眞文官)으로 등용하여, 그들과의 교류가 이즈하라에 체재할 때부터 시작되었다.

이즈하라는 3면이 산과 언덕으로 둘러싸인 작은 마을로, 번주의 거관(居館)을 비롯해 우마마와리(馬廻り)라 불리는 상급 번사(藩仕)의 저택이나 사찰이 마을의 주요한 장소를 차지하고 있었다. 3사신의 숙사는 때에 따라 특별히 설치된 관사이거나 류효인(流芳院), 케이운인(慶雲院), 다이헤이지(太平寺) 등의 큰 사원으로 정해졌다.

1811년의 마지막 통신사는 이즈하라에서 국서를 전하는 빙례를 행하게 된다. 쌍방의 경비 절감이 주된 이유였다. 에도로부터 장군을 대리하여 상사 오가사와라 타다카타(小笠原忠固), 부사 와키사카 야스타다(脇坂安董), 그리고 하야시다이가쿠노카미(林大學頭) 등이 대마에 와서 328명의 통신사 일행을 맞았다. 역지빙례(易地聘禮)라 불린 이 의식을 위해 통신사 일행이나 에도로부터의 빈객이 한꺼번에 쇄도하기 때문에 객관의 신개축, 도로나 항구의 수리 및 기타 비용 등 대략 12만 량의 자금이 투입되었다고 한다. 좁고 작은 이즈하라 마을이 이 한때만은 통신사 붐으로 들끓었다.

대마를 출발한 통신사선단은 다시 해협을 건너 이키섬에 도착한다. 이 사이의 항로도 강풍이 자주 부는 험난한 해역이어서 통신사가 탄 배도 자주 선체가 손상되었다. 그다음으로는 이키로부터 동쪽으로 향해 하카타(博多)만을 오른쪽으로 바라보면서 아이노시마(相島, 藍島)에 도착한다. 후쿠오카번의 영지로, 주위가 약 6킬로미터인 이 섬은 큐슈 본토에서 약간 떨어져 있지만 초생달 모양의 양항이 있었기 때문에 통신사선단의 기항지로 정해졌다. 이어 선단은 시모노세키(下關)를 거쳐 세토나이카이(瀨戶內海)를 항해하면서 여러 곳을 둘러 약 2개월의 긴 항해 끝에 오사카에 이른다. 여기서부터는 통신사 전용 선단을 정선시키고 육로로 교도와 비와코(琵琶湖)를 지나, 나고야, 시즈오카, 하코네 등 나카센토(中線道)를 따라 에도로 갔던 것이다.

통신사 일행은 약 500명이며, 그 밖에 대마번주와 관리들, 이테이안의 두 장로와 그 종자(從者) 등 수백 명이 수행하여 무릇 천 수백 사람들이 한 무리를 이루어 에도까지 몰려갔기 때문에 중간 가착지에서나 에도에서의 혼잡함은 상상을 초월 했다.

300~400년이 지난 오늘 날, 조선통신사 행사는 2002 월드컵 한일 공동주최 이후 양국 간의 새로운 문화교류 행사로 부상하여 해마다 꾸준히 확산되는 추세에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부산광역시가 막대한 예산을 들여 2003년부터 통신사 관련 다양한 문화행사를 매년 개최한다. 서울 창덕궁에서 통신사 일행의 출발에 즈음하여 국왕이 직접 국서를 전교하는 행사의 재현, 부산까지 가는 도중 묵었던 청주, 경주, 밀양 등 연고지에서의 행렬재현이 벌어지고 있다. 부산에서는 행렬재현 뿐 아니라 연가대의 해신제 등 각종 부대행사까지 곁들인 다채로운 축제로 승화되고 있다.
[2005.11.28 22: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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