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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대마도는 우리 땅인가]조-일 우호교류 족적 남긴 외교관-경상일보(2005.11.30)
등록일 2005. 11. 30 조회수 2,191
⑥ 아메노모리 호오슈와 통신사


대마도에 있는 아메노모리 호오슈의 무덤과 초상화(원안).

아메노모리 호오슈는 조선통신사 담당 외교관으로 대마도 이테이안에 파견된 에도 막부의 진문관으로서 양국 우호친선을 위해 노력한 훌륭한 외교관이었다. 이즈하라에는 이테이안과 아메노모리 호오슈의 무덤이 남아 있다. 지난해 11월27일 이즈하라 소학교 강당에서는 그의 250주기제가 열렸다. 이 기제에는 항일 양국의 통신사 관계인사 200여명이 참석하였으며, 기제에 이어 그의 묘소 참배까지 이어졌다.

300년 전 역사의 뒤안길에 묻혀있던 아메노모리 호오슈라는 이름이 우리의 귀에 익숙해진 것은 불과 20여년 전부터였다. 통신사와 호오슈에 관한 관심은 재일교포 역사학자 신기수(辛基秀) 교수가 1979년 2월에 제작한 '에도시대의 조선통신사'라는 50분짜리 기록영화에서 비롯됐다.

이 영화는 당시 아사히 신문의 3월26일자 사설을 통해 비중 있게 다뤄졌을 정도로 당시 왜곡된 한국관을 지녔던 일본사회에 엄청난 파장을 불러 일으켰다. 그로부터 10여년이 지난 후 1990년 노태우 전 대통령이 일본을 공식 방문해 천황 주최 공식 만찬 때 행한 연설에서 호오슈의 이름이 언급된 것이 하나의 계기가 되었다.

만찬사 끝부분에 결론으로서 "270년 전 조선과의 외교를 담당했던 호오슈는 선의와 신의의 교제를 신조로 삼았다"라고 말한 것이었다. 호오슈에 관한 대통령의 이 한마디가 언론에 소개됨으로써 도쿄 주재 외교계에는 물론 일본 외무성과 학계에 커다란 파문을 던졌다. 놀라운 것은 노태우 대통령 방문 이후 얼마 안되어 일본에서는 아메노모리 호오슈의 평전이 발간되었으며, 이를 계기로 조선통신사가 지나갔던 일본 각지에서는 지자체가 나서 전국적인 연락협의회를 결성하고 해마다 조선통신사 행렬을 재현하는 축제를 벌이게 된 것이다.

호오슈는 1668년에 태어났다. 그는 1689년, 22세 때 쥰안의 추천으로 대마번 근무의 관직을 받았다. 대우는 22인의 급료, 금 10량으로 에도의 번저(藩邸)에 근무하게 되었다. 동시에 학문계고(학문·기예 등을 배움)를 위해 계속해서 스승 밑에서 면학에 힘쓰도록 명령 받았다.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막부의 명을 받아 나가사키로 가서 중국어를 배웠다.

호오슈의 어학 재능은 대단했다. 원어민에게 배우면서 음독과 훈독을 반복했다. 그리고 가능한 한 젊어서부터 배운다는 외국어 습득의 3원칙을 몸으로 실천할 수 있었다. 그 뒤에 1703년과 1705년에 그는 조선어를 배우기 위해 부산으로 건너가게 된다. 부산 왜관에서 3년 동안 근무하면서 경상도 사투리를 자유롭게 구사할 정도로 조선어와 조선의 사정에 능통했다고 한다.

호오슈는 1693년 비로소 본 근무지(本領)인 대마로 건너갔다. 당초의 역할은 진문역으로 200석의 녹을 받았다. 그 후의 직책은 조선 어용지배좌역(御用支配佐役)으로 녹은 230석으로 가증됐다. 그의 일은 대마에서 조선의 동래부(부산 북쪽에 있던 대일외교를 위한 출장기관) 등으로 보내는 서계의 초안 작성이나, 무역과 기타 업무를 위해 대마를 방문하는 조선 역관들의 접대 등이었다.

이 일을 통해 호오슈는 대마번의 심각한 재정사정, 번의 관리와 조선인 역관들 사이의 이런저런 비리의 실정, 조선과 대마 사이에서 맺어지고 있던 약조나 전례 등을 상세히 알게 된다. 1702년 호오슈는 번주 소오 요시자네의 은퇴를 통고하는 고돈참판사의 선장(船長)을 맡아 조선에 건너갔다.

1711년 이에노부(家宣)가 장군이 되어 조선에서 통신사가 오게 되었는데 호오슈의 신변은 갑자기 바빠졌다. 특히 이에노부의 측근인 아라이 하쿠세키는 통신사 도래 직전이 되어서야 장군의 칭호, 중도 접대나 의례에 대해 많은 변경이 있음을 알려왔기 때문이다.

특히 1711년 8회 통신사(정사 조태억) 때 장군칭호를 다이쿤(大君)으로부터 '일본국왕'으로 변경하라는 하쿠세키의 지시에 호오슈는 심적으로도 고생이 심했다. 그는 내심 반대하는 의견이었으나 막부의 지시를 정면으로 거부 할 수 없었기 때문에 부산으로 건너가서 조선 측의 이해를 구하는 역할을 맡아 어렵게 조선 측 양해를 얻어냈다. 이때 통신사는 그해 7월에 대마부중(府中)에 도착하여 에도로 출발했으며, 11월에 에도에서 빙례를 마치고 다음해 2월 대마로 돌아왔다.

호오슈는 그 다음번 1719년의 요시무네(吉宗) 습직 축하 통신사 때도 대마와 에도를 왕복했다. 키슈(紀州) 와카야마(和歌山)의 도쿠가와 가문 출신인 요시무네는 즉위하자마자 마나베 아키후사(間部詮房)와 아라이 하쿠세키 등 이에노부, 이에츠구(家繼) 정권 하의 브레인들을 곧바로 추방하고, 일단은 후다이(譜代) 문벌(門閥) 로오쥬의 의견에 따르기로 했다. 그 후 우여곡절 끝에 쇼도쿠(1711~1716) 때의 빙례 개혁이 그 내용에 대한 검토도 없이 모두 취소되어 '일본국왕' 칭호도 이 뒤에는 전혀 쓰여 지지 않았고, 장군은 막부 말기까지 외국으로부터 '타이쿤'으로 불리게 된다.

그 동안 통신사의 에도 왕복에서는 별다른 큰 분쟁은 없었다. 그러나 대마에서 번주 면전의 시문응수 자리를 둘러싼 구례와 명분의 갈등, 귀로에 교토 다이부츠덴 앞에서의 초연(招宴)을 거부하는 등 몇 가지의 사소한 분쟁이 있었다. 그 때마다 호오슈는 번의 입장에 서서 수습하고, 변명하면서 사태를 원활히 수습하는 역할을 해내야만 했다. 또한 에도에서도 빙례의 차례를 사절에게 알리는 한문 서식을 쓸 수 있는 것은 호오슈 밖에 없었다. 어느 쪽도 헤아릴 수 없는 마음고생이었다.
[2005.11.29 22: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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