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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대마도는 우리 땅인가]조-일 양국 실익존중 강조 리얼리스트-경상일보(2005.12.1)
등록일 2005. 12. 01 조회수 2,257
⑦ 신유한의 해유록과 호오슈의 성신 교린


호오슈의 '성신교린' 정신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현창비. 호오슈는 서로 속이지 않고, 싸우지 않고, 진실로써 교류하는 것을 성신이라고 정의했다.

1719년(숙종 45) 통신사 일행의 제술관(製述官) 신유한(申維翰)의 '해유록'에는 대마에서의 이별에 즈음해 '오늘 저녁 정이 있어 나를 보낸다. 이 생에서 다시 그대를 만날 기약이 없네'라는 한 구절을 호오슈에게 써준 기록이 있다. 이 두 사람 사이에는 반년이 넘는 오랜 여로에서 서로의 입장의 차이는 있었지만 고난을 함께 하며 뜨거운 우정이 싹텄던 것이다.

호오슈는 장수했다. 그가 1755년 88세로 죽기까지, 정확하게는 81세에 은거를 허락받기까지 현역 관리로 대마번에서 근무했다. 조선방(朝鮮方) 어용지배좌역(御用支配佐役)은 본인의 요청에 의해 1721년에 그만뒀지만 어용인역(御用人役)은 계속했고, 그리고 또 한 번 재판역(裁判役=외교관)으로서 조선에 가기도 했다.

그러는 동안 호오슈는 조선과의 무역이나 번의 재정에 대해서, 또한 조선과의 교섭을 전담할 인재를 본격적으로 양성하도록 번주에게 자주 진언했다. 아울러 조선으로 건너가 조선인 관리와의 복잡한 교섭을 번의 입장에 서서 처리하는 일도 맡았다.

이 무렵 가장 큰 문제는 대마번의 재정 악화였다. 조선 무역을 주된 재원으로 하고 있던 대마번에 있어서 몇 가지 어려운 조건이 불거져 나왔다. 그 하나는 막부가 쇼도쿠(1711~1716년) 때에 화폐의 개주를 꾀하고, 그것을 대마번이 고려인삼 수입의 대가로 수출하고 있던 은의 품질에도 적용하려 했던 것이다.

이 일에 대해서 호오슈는 아라이 하쿠세키에게 건의문을 보내고, 이어서 직접 만나서 그 중지를 요청했다. 다른 하나는 고려인삼이 부족해지기 시작하고, 또한 '누케니'라 불리는 밀무역이나 쌍방 관리의 부정으로 규격에 맞는 품질의 상품을 제대로 수입할 수 없게 된 일이었다.

호오슈는 '린코시마츠모노가다리(隣交始末物語)'라는 제목의 논문을 썼다. 내용은 임진왜란 이후 조일 관계의 역사와 대마번이 해온 역할을 체계적으로 서술한 것이다. 이 논문을 아라이 하쿠세키를 비롯한 막각(幕閣)에 제출해 대마번으로서는 조선 무역이 사활이 걸린 문제임을 호소했다. 대마는 섬 전체가 산지이기 때문에 경작 가능한 면적은 극히 제한적이다. 가격(家格)은 10만 석격(石格)이라 부르고 있지만, 이는 조선무역의 이익이 있었던 데다 조선 외교 담당번으로서의 명목 때문에 얻어진 것일 뿐, 실제로는 도내에서 쌀 외의 잡곡을 다 모아도 수천 석 정도의 수확 밖에 없었다. 이에야스에 의한 국교재개 당시 그 공을 인정받아 히젠(肥前) 타시로(田代)에 2천800석이 가증되었다. 그러나 여전히 대마번의 재정은 만성적 적자로, 더구나 그것이 누적되기 때문에 호오슈의 말을 빌자면 '소라 껍질 같이' 점점 쇠퇴하는 상태였다. 따라서 조선 외교를 떠맡기 위해서도 섬 밖에서의 영지 가증이나, 조선 무역의 지속을 위한 특별조치가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조선과의 교섭에서는 쓸데없는 분쟁을 일으키지 않고, 대마번의 실익을 손상하지 않는 자세로 시종일관했다. 조선은 국교 회복의 근거가 된 기유약조에서 대마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특권을 부여해왔다.

기유약조란 1609년(광해 1) 조선조정이 일본과의 통상을 허용하는 형식으로 맺은 조약이다. 이 조약은 임란 후 대마번주가 세 차례(1599~1600) 조선 조정에 통교 허용을 간청한 바 있었다. 이에 사명대사가 1604년 '탐적사'로 일본에 건거 갈 때 대마번주 소오 요시토시에게 통교의 전제조건으로서 침략을 사죄하는 일본 국서를 정식으로 보내고, 전란 중 정릉과 선릉을 도굴한 범인의 인도, 그리고 일본으로 강제 연행된 우리백성 피로인의 송환을 조건으로 제시했다. 이러한 전제조건이 사명대사와 도쿠가와 이에야스와의 후시미죠(伏見城) 강화협상에서 타결되어 1607년 국교재개와 더불어 전란 후 제1회 통신사를 파견함으로서 충족되어 기유약조가 성립된 것이다. 이 조약으로 조선조정은 매년 쌀과 콩 100가마를 내리고, 대마도주의 세견선은 20척(이중 3척의 특송선 포함)으로 하며, 대마번의 관리(受職人)는 1년에 한번 조선을 방문할 수 있되, 다른 사람의 파견은 금하도록 되어 있었다.

호오슈는 현지에 출장하여 조선 측의 관리와 교섭할 때에는 구례나 관행을 미리 잘 조사하고, 그것들을 이용하여 도리에 맞는 논리를 전개해야 한다고 강조하고 스스로 그것을 실천했다. 그러한 실무 교섭의 기본적인 방식을 정리하고 번내 유력자의 참고를 위해 쓰여 진 책이 곧 1728년에 완성된 '코린데이세이(交隣提醒)'이다.

그 마지막 장에서 호오슈는 '성신의 교류'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성신(誠信)이라는 것은 실의라는 것으로, 서로 속이지 않고 싸우지 않고 진실로써 교류하는 것을 성신이라 한다'. 그리고 조선과 '성신의 교류'를 맺으려고 생각하면, 원래는 조선으로부터의 다양한 우대조치에 의지하려 해서는 '진정한 성신'이라 할 수 없다. 그것을 급히 고칠 수 없는 것이라면, '실의(實意) 즉 서로의 실익(實益)을 존중하는 태도를 손상시키지 않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이것은 리얼리스트인 호오슈의 일면이다. 이렇게 외교의 성신, '진실한 교류'라는 말은 대마번이 처한 현실로부터 출발하여 이상적인 선린관계를 지향하는 방향을 다시 제시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조선통신사 연구가인 교도 조형예술대학교 나카오 히로시(仲尾 宏)교수는 그의 저서 '조선통신사'에서 호오슈의 생애, 역사관과 업적을 종합 평가한 다음 이렇게 결론지었다.

"이것들은 통신사를 수행한 두 번의 체험, 하쿠세키와의 논쟁이나 하쿠세키의 개혁이 조선 측에 주었던 영향을 알고, 조선의 문인이나 학자와도 우정으로 맺어진 인생 경험이 호오슈에게 있었기 때문에 나온 결론이자 역사관이었다고 할 수 있다".
[2005.11.30 22: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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