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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슬픈 운명 딛고 일어난 섬,'오픈마인드 쓰시마' -프라임경제(2009.3.21)
등록일 2009. 03. 27 조회수 2,280
슬픈 운명 딛고 일어난 섬,'오픈마인드 쓰시마'
쓰시마여행가이드①-척박한 환경딛고 첨단문화 누린 곳

[프라임경제] 객손에게 여행지는 친절하지 않을 수 있다. 특히 섬은 제한된 공간과 폐쇄적인 문화로 여행자들에게 전부를 드러내 보이지 않을 수 있다. 특히 일본 쓰시마(대마도)처럼 ‘역사’와 연관된 곳은 더 그렇다. 우리가 흔히 ‘신라의 고도’라면서 경주에 수학여행을 가지만, 경주 여행이 즐거웠다고 추억하는 사람들이 거의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쓰시마 역시 조선통신사 단어 하나만 갖고 갔다가는 경주를 찾는 고등학교 수학여행단처럼 스치고 지나가기 쉽다. 해마다 많은 한국인 관광객이 찾는 곳이지만, 아직 외국여행을 해 본 여행자들에게 ‘가장 좋았던 곳’으로 꼽히는 관광지는 아니라는 점은 많은 것을 시사한다.

‘이야기’가 많은 곳일 수록 잘 모르고 온 자신을 찾아온 여행자에게 친절하지 않을 수 있다. 신문 기사 같은 간명하게 이야기가 파악되는 여행지를 원하는 사람이라면 따라서, 중국이나 동남아 등이 좋을 수 있다. 하지만 얇은 잡지 한 권 정도의 자료를 부산에서 출항하는 배 안에서 훑어볼 정도의 성의가 있는 사람이라면, 충분히 쓰시마 여행이 즐거울 수 있겠다.


<사진=산이 많아 좋은 밭이 없다는 삼국지 표현이 딱 맞는 쓰시마섬. 해안까지 산세가 밀고 내려와
있는 것을 볼 수 있는 이즈하라항 전경이다.>



쓰시마는 우리 나라와 무척 가까운 섬으로, 부산항에서 떠나는 씨프린스 호 등 쾌속여객선을 통해 손쉽게 방문할 수 있다. 쓰시마 사람들 입장에서는 후쿠오카보다 부산이 더 가깝다고 할 정도다. 여행상품 가격도 상대적으로 싼 편.

이런 장점을 살려, 쓰시마 여행을 제대로 즐기려면 둘 중 하나는 필요하다. 공부(?)를 하고 가거나, 느리게 사는 ‘로하스’ 족이 되기로 마음을 먹거나. 이국적인 색채를 느끼겠다는 마음이 충만하거나, 첫눈에 ‘확 꽂히는’ 무언가를 원하고 현해탄을 건넜다가 수박 겉핥기를 하고 간 많은 한국 관광객들을 타산지석으로 삼아 역사의 흔적과 아름다운 자연을 천천히 둘러보면서 ‘재충전’을 해 보자.

◆‘산이 많아 좋은 밭이 없는’ 섬, 그래서 그들은 ‘한류’를 사랑했다

부산을 떠난 배가 일본 쓰시마에 도착하면서 눈에 들어오는 풍경은, 항구 바로 뒤편까지 산기슭이라고 보일 정도로 평지가 적다는 것이다.

이즈하라 항에 입항하면서 본 첫소감은 “삼국지가 옳았다”는 것이다. 쓰시마는 고려 말 왜구들의 소굴로 유명한 곳이며, ‘삼국지 위지 왜인전’에는 쓰시마를 일러 “산지가 많아 좋은 밭이 없다”고 설명했다.

좋은 밭이 없는 가난한 섬사람들은 자연히 바다에 기대어 살게 마련이다. 어로활동으로 먹고 살기가 팍팍해지면 배를 부려 노략질로 연명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래서 쓰시마는 고려 말에도 그랬지만, 조선 초에도 골칫거리였다. 세종대왕 시절 대함대를 구성, 쓰시마를 토벌한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하지만 쓰시마를 불쌍히 여긴 조선은 어느 정도 은전을 베풀어 먹고 살 길을 보조해 주었다. 그리고 일본으로 보내는 조선통신사를 쓰시마에 경유하게 함으로써, 쓰시마를 변방의 별 볼 일 없는 촌구석에서 일약 일본에서도 상대적으로 주목받는 ‘선진 문화의 관문’ 지위를 누리게 해 주었다.

시쳇말로 ‘한류’를 가장 먼저 받아들이고 이걸로 먹고 사는 동네가 된 셈이다. 지금은 그 한류를 전해주던 조선통신사의 후예들이 바람을 쐬러 관광을 오고 있으니, 쓰시마 사람들은 한국에 어느 정도 우호적이다. 이즈하라 시내에서 정오면 울려퍼지는 ‘고향의 봄’ 노래처럼, 이들은 정통 일본문화를 보여주겠다는 생각보다는 ‘친한 척’을 하고 싶어한다.



◆ 조선통신사와 항일 정신이 교차하는 곳

이즈하라항으로 입항하면 시내를 관통하는 운하를 따라 난 길을 걸어본 다음, 역사박물관으로 올라가 보자. 이곳은 나지막한 몸체로 조용히 엎드려 관광객을 기다린다.

쓰시마 자체가 물산이 풍부한 곳이 아니라, 자랑할 만한 특산품이나 진열품이 별로 없다. 그래서 진열품은 ‘쓰시마 자신’을 자랑하기 보다는 ‘쓰시마에 들러준 조선통신사’와 그 흔적, 그리고 조선에서 수입한 당시 ‘신상품’들을 자랑하는 데 여념이 없다. 박물관 기념 스팸프 역시 조선통신사 행렬 그림을 작게 축소한 것이다.

<사진=최익현 선생 순절비>

박물관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자리한 수선사는 일본식 불교 사찰로, 불공을 올려 많은 망자들의 극락 왕생을 기원해 주고 있다. 이 곳에서는 면암 최익현 선생의 추모비가 서 있다.

면암 선생은 고종 황제를 등에 업고 독재로만 치닫는 흥선대원군에 반발, 상소문을 올림으로써 대원군이 정치일선에서 은퇴하게 한 ‘강골’이다. 전국 각지의 선비들이 그의 기개를 높이 사 이후 유림의 핵심인사로 꼽혔다.

그런 그가 일본의 침략 흉계에 반발, 의병을 조직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노구를 이끌고 의병 활동을 펴던 그는 일본군에 체포, 군사재판을 거쳐 쓰시마로 압송됐다. 이 곳에서 면암 선생은 스스로 곡기를 끊어 세상을 떠났다.

바야흐로 온갖 새로운 트렌드가 넘쳐나고, 뭐가 옳고 그른지도 점차 불명확해가는 시대다. 항상 ‘시류와 양지’를 따라 움직이기 보다는 살아있는 권력, 파죽지세의 외세에 맞서는 노곤한 그러나 일관된 삶을 살아온 면암 선생의 마지막 자취 앞에서 잠시 묵상을 하며 내 인생의 키워드는 뭔가 자문해 보는 것도 의미있을 것이다.

쓰시마 도주를 오래 지낸 일본화족 소오 가문의 집안 묘지도 둘러볼 만 하다. 조용한 공원처럼 잘 조성돼 있는 곳으로, 일제의 정책으로 소오 집안과 강제 결혼한 대한제국 덕혜옹주 결혼기념비가 서 있다.



덕혜옹주(‘옹주’는 후궁의 소생으로 태어난 여자후손이다. 중전이 낳르면 ‘공주’다) 어린 나이에 일본으로 끌려왔다. 정신질환까지 생겨 광복 이후 삶 역시 평탄하지 않았다. 훗날 서울 낙선재에서 살던 그녀를 찾아 소오 백작이 찾아오기도 했다지만, 비서관이 옹주의 상태를 감안, 면담을 막았다고 한다.

불행한 결혼생활에 남편과 아내 어느 쪽인들 더 불행하고 덜 불행했으랴마는, 남의 나라에 끌려온, 그리고 여자라 불행한 결혼생활에 더 감정의 상처가 깊었을 옹주쪽이 그래도 더 불행했다는 시각이 더 타당할 것이다. 무엇이 옹주와 백작을 소통불가의 상황으로까지 치닫게 했을까? 불행한 한일관계의 한 단면으로서만이 아니라, 연인이나 부부들이 함께 들른다면 깊이 새길 만한 대목이다.

이렇게 아픈 역사의 흔적만 남아 있는 건 아니다. 옛 조선통신사가 들러 일본측과 의논을 하던 곳에서는 수선선사에는 한일 우정의 상징이 남아있다.


<사진=유학자이자 조정 대신이던 학봉 김성일은 방일 도중 일본 승려와 깊은 학술 교류를 나눴다.>

학봉 김성일 선생 기념비가 있는 것. 유학자였던 김성일은 쓰시마 방문 당시 쓰시마 도주가 준비한 의전이 부실하다는 이유로 강하게 항의하는 등 ‘무서운 외교관’으로서 역사에 남아 있다. 하지만 그는 학문을 좀 아는 일본인 승려 현소와 깊이 교류했다. 현소가 선생의 학문과 시를 흠모했고, 그 문화 교류의 흔적이 비석으로 남아 있다.

현소는 훗날 임진왜란이 터지면서 일본군을 따라 조선에 건너오는 악연이 있지만, 이들의 국경과 연배를 초월한 문화 교류의 정신은 지금도 비석처럼 굳건히 서 있다.

◆ 두려움을 넘은 도전의식, 여몽연합군 상륙지와 쓰쓰자키 전망대

하지만 우리라고 항상 쓰시마에 뭔가 선물만 해 준 것은 아니다. 그리고 쓰시마 사람들이라고 늘상 외세가 달가웠던 것도 아니다.

쓰시마는 때로 무섭게 육박해 오는 외세를 직면하거나 그 두려움에 떨면서 지내기도 했다.

그 두려움의 흔적이 쓰시마에는 몇 군데 남아 있다. 그리고, 이들은 쓰시마에서도 손꼽히는 경치를 자랑하는 곳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우선 우리 나라 고려시대에 여몽연합군이라는 이름으로 일본을 침공했던 해안에 신사와 기념비가 남아 있다.

당시 몽고(원나라 쿠빌라이 시대)의 요구에 부응해, 고려군은 연합군을 조성, 일본에 상륙한다. 일본인들은 타격을 받았지만, 때마침 불어온 계절풍으로 ‘원정경기’ 중이던 고려와 몽고군의 배들이 대거 파손돼 승리를 거뒀다.




<사진=생각해 보라. 당시 세계 최강이던 몽고가 바다가 까맣게 덮일 정도의 대함대로 침공해
왔을 때 이곳에 서 있던 장졸들의 심경을. 아마도 지금 미국해군 소속 원자력 항공모함들이 모
두 아프리카 어느 나라를 쳐부수겠다고 그 해안에 집결한 것과 비견할 수 있을까?>

그 바람이 바로 가미카제. 홋날 태평양 전쟁 말기 일본군이 편성한 자살 항공대의 이름도 여기서 비롯됐다. 지금 여몽연합군이 상륙했던 이 곳 바닷가에는 신사가 서 그 당시 희생자를 추모하고 있다.



그런가 하면, 쓰시마 최남단 전망대(쓰쓰자키 전망대)는 좀 더 현대에 세워진 외세 침공의 대비 흔적이 남아 있다.

일본인들은 1940년대, 이곳에 해안 포대를 조성했다. 아마도 미군이 언젠가 일본 본토에 싸움을 걸 수도 있으리라는 두려움이 그들을 떨게 했을 것이다. 그 포대는 원자폭탄이 일본에 떨어지던 그날까지도 실제로는 사용되지 않았고, 패전 직후 철거됐다고 안내를 하던 일본인은 설명한다.

그래서 ‘상상의 포대’라고 어느 안내서에는 나와 있기도 하다. 대포는 뜯어내 흔적도 없지만, 사람을 곁에 세우고 찍은 포의 수납고 문짝 크기를 보면 그 크기를 가늠할 수 있다.

대포는 뜯어내고 없지만, 이 곳에 일본인들은 칼을 뽑아든 천왕상을 세워 거친 파도의 해안을 굽어보게 만들어 놓고 있다. 이처럼 쓰시마섬 곳곳에 숨은 비경(秘境)들은, 그저 아름다운 경치에 그치지 않고 ‘나보다 더 강한 누군가’에 전전긍긍하지 않을 수 없었던 불행한 역사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그러나 거기서 도망치고 잊고 애써지운다 한들, 나아지는 게 있을까? 그래서 이들은 정직하게 그 자리에 탑을 세우고 망자를 달래는 일을 게을리하지 않고 있다.

두려움을 넘어서서 늘 수평선을 정면으로 바라보게끔 전망대를 세우고 있는 쓰시마섬 당국은, 항상 바깥과 통하는 것을 거부하고 살 수 없을 바에는 당당히 외부를 응시하자는 이들의 오랜 철학을 내비치고 있다.

점심시간을 알리는 노래로 ‘고향의 봄’을 틀어주는 ‘외국인에 대한 서비스 정신’이 겉마음이라면 최남단 전망대는 이들의 당당한 속내를 말하고 있다.


<사진='폭풍의 언덕' 쓰쓰자키 전망대에 서다.>



<계속> 취재협조: 대마도 부산사무소 051-254-9205, 대아고속해운 051-461-0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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