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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대마도 유적지 기행(2)…아소만 절경-국제신문 시민기자(2011.1.16)
등록일 2011. 01. 18 조회수 5,679
일본 대표 리아스식 해안 그림처럼 펼쳐져


<코모다마하 신사 입구(토리이) >

관광은 어디를 가나 거의 비슷하다. 아침 일찍 일어나서 그날 일정에 따라 차량으로 이동을 하니 항상 바쁘기만 하다. 그러나 대마도는 여유가 있다. 땅이 거제도의 1.5배이며, 인구는 36000명 정도다. 남단에서 북단까지는 82km다. 관광은 한국사람이 98%라고 한다.

오늘은 고모타하마 신사(일본에서 왕실의 조상이나 고유의 신앙 대상인 신 또는 국가에 공로가 큰 사람을 신으로 모신 사당)를 방문하기로 되어 있다. 일본은 유독 신사가 많은 곳이다. 사람이 죽으면 화장을 해서 절에 가족이나 공동으로 모시고 있으며 매장은 없다. 신사는 토리이라는 문을 제일 먼저 통과한다.

쓰시마번주 소스케쿠니와 부하의 장병을 함께 모시고 있는 고모타하마신사라는 곳이다. 1274년 원나라의 일본 원정으로 대마도가 침략을 당했을 것으로 추정은 되지만 정확한 자료가 없다고 가이드가 설명하고 있다. 자료에 사스라는 지명이 나온 것에 의해 소스케쿠니가 전사한 것으로 추정만 하고 있을 뿐이다.


<신사 내 신을 모신 돌탑. >

전쟁 당시 해안선은 이곳에서 500m상류에 위치하고 있었다. 소스케쿠니는 해안으로 들어온 원나라 군대를 맞아 말 80기로 맞서 싸웠다고 한다. 매년 11월12일은 분에이노에끼(원나라의 일본 원정)을 잊지 않기 위한 대제를 지낸다고 한다.

대제 때는 가마행렬이 이어지고 씨족신을 받드는 사람들이 선조 때부터 전해오는 오래된 투구나 갑옷, 창 등을 몸에 찬 무사의 모습으로 참가를 하고 있다.

이곳과 근접한 거리에 돌로 지붕을 만들어 놓은 이시야네 돌지붕을 만날 수 있었다. 돌지붕은 일본이 지정하는 유형문화재로 보존을 하고 있다. 기둥과 벽은 나무와 흙으로 만들었는데 지붕만 돌로 이었다. 그것도 길쭉한 평면 돌을 맨 위에 두고 아래로 내려올수록 작은 돌을 사용한 것이 특징이다. 개인정원이 아주 잘 가꾸어진 어느 가정을 방문했는데 정원수며 모든 것이 잘 관리되어 있었다.

해발 385m의 가미자카공원 전망대에서 보는 대마도는 눈앞에 일본의 대표적인 리아스식 해안인 아소만이 그림처럼 펼쳐져 있는 전망대다. 이 아소만을 천연의 연못 삼아 높고 낮게 이어진 산봉우리들, 반대편으로는 끝없이 펼쳐지는 바다와 하늘, 대마도 사람들은 이곳을 천하의 절경이라고 한다. 필자가 보아도 그럴싸한 말이다. 일본 열도 전체 400여 섬 중 대마도가 100여 개를 가지고 있으며, 대마도 섬의 80%는 무인도라고 한다.

맑은 날이면 북쪽 바다 너머로 한국이, 남쪽으로는 멀리 일본 본토 규수의 산들이 보인다. 이 같은 전망은 대마도에서만 볼 수 있다. 여름밤 바다 위로 오징어잡이 배의 불빛이 반짝이는 모습은 황홀하다. 야간 전망대는 올라가지 못해서 아쉬움을 남기고 왔다.


<대마도에서만 볼 수 있는 이시야네 돌 지붕 집. >

조선 고종의 왕여 덕혜옹주는 1931년 5월 일본 무지공과 결혼한 뒤 그해 11월 대마도를 방문했다. 옛 대마도주 종가당주가 조선의 왕여를 부인으로 맞이하여 대마도를 찾았으므로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이곳에 세워진 덕혜옹주와 무지공의 비석은 두 분의 성혼을 축하하기 위해 대마도에 사는 한국인들이 건립했다고 한다.

청수산성에는 대마도민들이 경축하여 세우고 심었던 기념비와 철쭉이 지금도 잘 자라고 있다. 결혼생활은 많은 고통이 있었으나 딸 정혜를 낳아 서로 신뢰와 애정이 깊었다. 그러나 양국의 갈등이 심하여 두분은 1955년 결국 이혼했다.

무지공은 1985년에, 덕혜옹주는 1961년 귀국 후 1989년에 각각 별세했다. 이제 역사에 묻혀있던 이 기념비를 재건하여 두 분의 힘들었던 생애를 되돌아 보면서 양 국민의 진정한 화해와 영원한 평화를 국민들은 바라고 있다. 비석 앞에서 큰절이라도 올리고 싶었지만 간단한 묵념으로 대신 참배를 했다.


<가정집 정원수가 잘 가꾸어져 있다. 동백꽃이 예쁘게 피었다. >

구한말 대 유학자이자 구국 항일투쟁의 상징인 면암 최익현 선생은 대마도에 유배되어 순국하셨다. 선생의 넋을 기리고자 1986년 한일 양국의 유지들이 힘을 모아 화장을 하여 비를 세웠다. 운구를 하려니 뱃길이 심술을 부려 결국 수선사에서 화장을 한 뒤 충남 예산에 봉안했다고 한다.

대마도민 모두는 한일 친선을 소중히 하고 한국인을 환영합니다. 일본 고유의 영토 대마도는 역사와 관광의 섬입니다, 라고 한글로 적어놓은 것만 봐도 한국 관광객과 낚시객이 이곳을 많이 찾는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래서 밤에 가라오케 비슷한 술집을 갔는데 나가사키현 도의원을 만났다.

이 사람은 대마도 홍보대사에 가깝다. 많은 시간 술로 주고받다 보니 정치인답지 않게 소탈하고 인정이 많은 사람임을 알 수 있었다. 동아대학교에서 잠시 공부를 했다고 한다. 직접 기타 반주를 하며 한국 노래를 불러주었다. 일본 정종잔은 우리 소주잔 보다 조금 크다. 한잔에 7000원이다.


<조선통신사가 일본 본토를 가기 위해 이곳에서 묵었다는 기념비. >


<덕혜옹주의 결혼비가 있는 곳. >


<등산로 입구에 메달린 안내표시는 한국글 뿐이다. >


<에보시다케 전망대서 바라본 대마도 바다풍광 >


<수선사로 올라가는 계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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